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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서버의 문제로 오래된 글이나 사진이 일부 나오지 않고 있는데, 그런 글 중의 하나로서 이 홈페이지에서 퍼 간 글을 두 군데를 거쳐 퍼 온 것임.^^

 


 

원전: 경희대 언론정보학과 동문회 / 박순백 동문(신방7기, 드림위즈 부사장) 칼럼 (퍼 온 글임.)

 

링크: http://old.communication.ac.kr/bbs/zboard.php?id=freeboard&page=5&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vote&desc=desc&no=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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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백 동문의 칼럼 중에서 그 당시 신문방송학과에 있었던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선배님의 허락 없이 퍼 온 글입니다. 공개된 이야기이니까 이해해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아무쪼록 재미있게 읽어 주세요.
(출처: 70년대 포크송 - http://cafe.naver.com/folksong70.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390)

대학 시절

- 군 입대 이전의 얘기들 -

'신문발송학과'에 입학하다.

대학 시절은 그 누구에게나 인생의 황금기라 할 것이다. 어린 시절을 마감하고, 본격적으로 자신을 스스로 통제해야 할 사명을 가지게 되는 때요, 성인으로 진입하면서 사회에 대한 책무도 생각해야 하는 때이다. 어른이 되고 싶었던 어린 시절을 마감하고, 어른이 됨에 따라 자신에게 부과되어 오는 가정과 사회, 국가로부터의 무언의 압력에 당황하는 시절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시기는 생의 일대 전환점이 된다.(사진: 경희대 신방과 1년 신입생 환영회에서 찍은 사진. 둘 째 줄 오른편에서 다섯 번째에 서있는 게 나. 그 왼편은 4학년 학회장, 다시 그 왼편의 두 분은 교수님들.)

내게도 그 건 마찬가지였다. 난 경희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그 학교는 1차 고교 입시에 떨어져서 억지로 간 학교였다. 하지만 경희고가 경희대와 같은 캠퍼스 안에 있어서 난 자주 대학 사회의 이모저모를 바라볼 수 있었으며, 아름답고 좋은 환경의 경희대에 진학하기로 진작부터 마음을 먹고 있었다. 고교 시절에 열심히 놀기만 해서 당시 대학 진학을 위한 필수 코스인 예비고사(일종의 학력 고사)마저도 겁이 났던 터이나, 결과를 보니 다행히(?) 합격이 되었다. 경희대는 2차 대학이었는데, 1차 시험조차 안보고, 타이틀 하나에 반해서 '신문방송학과'에 들어갔다. 진학 상담시 그 과를 '신방과'라고 부르는 걸 들었을 때부터 과 이름치고는 매우 희한하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에 진학하니 선배들은 실은 '신방과'가 아니라, '신발과'라고 해야 맞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신발과가 '신문발송학과'의 줄인 말로 이 학과 출신 중에서 가장 잘 되면 신문사 보급소의 소장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너스레를 떨곤 했다. 다시 말하면 건축과 나온 사람이라면 '개집' 하나는 확실하게 짓게 된다는 썰렁한(?) 농담과 비슷한 것이다. - 위에서 " '신문발송학과'에 입학하다."란 제목을 보며, '오자'(typo error)를 하나 찾았다고 기뻐했던 분들에게 이 부분에서 삼가 위로의 말씀을 드리는 바이다.

입학 이전에 왠지 모르게 신방과는 멋진 과일 것이란 막연한 생각이 들었는데, 그 이유 중에는 그 과에 가수 김세환 형(4학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방송을 통해서 트윈 폴리오의 송창식, 윤형주 등과 함께 이름을 얻고 있던 세환 형은 원로 연극인 김동원 씨의 자제로도 유명했다. 이지 리스닝(easy listening) 계열의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외모와 달리(?) 참으로 달콤했다. 고교와 대학이 한 캠퍼스에 있어서 난 자주 세환 형과 윤형주 형을 길에서 보곤 했다. 윤형주 형은 내가 가장 아끼는 후배인 윤정주(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강사)의 친형으로서, 이들의 부친은 당시 경희대 부총장으로 재직하고 계셨다.(윤영춘 부총장님은 영/중문학자로 유명한 분이었으며, 윤동주 시인의 삼촌으로서 그의 옥사 직전에 그를 찾아갔던 분이다.) 난 노래하길 좋아했기 때문에 세환 형이 있는 신방과를 좋아했던 면도 있다. (사진: 1학년 때 청평에서 찍은 사진이다. 입고 있는 스웨터는 1968년 그레노블 동계올림픽에서 낄리(J. C. Killy) 가 입었던 것과 같은 디자인의 스키 스웨터. 난 스키 선수 낄리를 지겹게 좋아했다. 왼쪽 가슴에는 대학 뱃지를 달고 있다. 당시엔 대학생이면 거의 대부분 뱃지를 달고 다녔다.)

세환 형은 현재 연예인 중에서 가장 스키를 잘 타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땐 안 그랬다. 세환 형은 내가 입학하자마자 날 찾아와서 "너 스키탄다며? 그 거 한 번 해보려고 하는데 어떡하면 되냐?"하고 다짜고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우리 나라 스키어의 총 숫자가 몇 천 명에 지나지 않던 시절이었다. 난 여러 모로 방법을 가르쳐 주었고, 그형에게 미국의 [Ski] 잡지를 빌려주기도 했다. 그 형은 결국 내가 대학에 들어간 71년 겨울부터 스키에 정진하게 되었고, 스키 뿐 아니라 모든 스포츠의 광이 되어 버렸다. - 사진: 71년 겨울은 눈이 좀 적었다. 강원도에도 눈이 별로 없다는 얘길 들으며 지내려니 무료하여 집에서 침대 매트를 깔아놓고, 스키 연습을 하기도 했다. 스키화가 요즘과 같은 플라스틱 및 버클식이 아니라 가죽제의 등산화처럼 끈을 매는 타입이며, 사진의 룩(Look) 바인딩은 프랑스가 아니라 일본의 등산 기구 제작사인 도쿄 톱(Tokyo Top) 사에서 제작한 것이었다. 스키복 바지가 타이츠처럼 딱 달라붙어 있고, 줄이 있는데, 이것이 60년대와 70년대의 가장 보편적인 스키 패션이었다.

젖소부인(?)

세환 형과 같은 학년에는 한정환이란 대단한 미남이 있었다. 그가 젊은 시절의 영화배우 한지일이다. 그 형은 임권택 감독의 많은 영화에 출현했는데, '백치 아다다'며, '길소뜸' 등이 아마도 그 형의 대표작일 것으로 생각된다.(그 형은 길소뜸으로 아시아영화제 주연상을 받은 바 있다.) 그 형은 현재 한시네마타운이란 비디오 제작사를 경영하고 있는데, 그곳이 문제의 '젖소부인 바람났네' 시리즈를 제작하는 벗기기 영화의 본산지가 되었다. 그 형은 졸업 당시만해도 대학출신의 영화배우가 드물어 손에 꼽히던 상황에서 영화다운 영화를 만들어야 함을 역설하던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 청년의 이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문예영화 몇 편에 손을 댔다가 집을 날리고, 잘 나가던 형수님의 아동복 패션점까지 날린 후에 우리 영화계의 차가운 현실에 눈을 떴다. 그로 인해 그 형은 할 수 없이 일단 돈이 되는 영화를 만들어 재력을 쌓고, 그 후에 정말 영화다운 영화로 되돌아가겠다고 방향을 수정했다.

어쨌거나 그 형은 빼어먹은 시간이 많아서 학점을 채우느라 많은 애로를 겪었는데, 태만한 학생의 꼴은 못 본다는 철학을 가진 한 교수님이 담당하시는 사회학 과목(1학년 필수 과목)의 학점 취득 결과가 졸업 여부를 결정할 단계였다. 그 형은 사회학 시간에 들어온 첫 날 과대표인 날 붙들고 "내 졸업은 네게 달렸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고 선언을 했다. 자신의 졸업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 훗날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얘기도 잊지 않았다. 난 최선을 다해서 그 형을 도왔다. 그런 나를 그 형은 무척이나 귀여워해 주었고, 학교 앞 커피점 등에 가서 많은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 형과 함께 다니다보면 이상스러울 정도로 하얀 그의 멋진 얼굴에 모든 여학생들의 시선이 모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어떤 여학생은 길을 가다 발길을 멈추고 홀린 듯이 그 형을 쳐다보며 알 수 없는 한숨 소리를 내기도 했다. 결국 그 형은 사회학 점수를 땄고, 졸업을 하면서 "넌 내 은인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 후에도 우리의 관계는 계속 지속되었고, 그 형이 외국 영화를 수입할 때 영어와 관련된 모든 일(편지로 주문하는 일로부터 뒷처리까지)을 시간이 날 때마다 도와주었다.(언젠가는 임권택 감독의 사모님을 형수님이 소개시켜 주셨는데, 그분이 날 보자마자 "아 벌써부터 만나고 싶었던 분이에요. 한 선생 부부가 좋은 후배가 하나 있다고 하면서 얼마나 말씀들을 많이 하셨던지..." 하고 반색을 하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신방과에는 초기의 개그맨으로부터 국가대표 배드민톤 선수까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별별 괴짜가 다 많았다.(개그맨이란 용어는 그 시절에 처음으로 생겨난 것이다. 당시엔 모두 코메디안이라는 용어만 사용했다.)  다른 과에서는 우리 과를 "딴따라과"라고도 불렀는데, 실제로 그런 면도 많았다. 아직 신방과와 커뮤니케이션학의 색깔이 정확히 규정되지 않았던 때이기 때문에 우린 아주 다양한 공부를 했다. 광고학, 문장론, 논설론, 영문 기사, 사회학, 화법, 사진학, 조사방법론(통계), 방송론, 신문학, 심리학, 매체 경영 등 도저히 한 학과의 과목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다양한 것들이었다.(전인 교육이라는 면에서는 매우 바람직한 과목 편성이란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난 신방학을 가끔 '잡학'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제와 생각하면 그처럼 다양한 과목의 수강을 통해서 대단히 많은 것을 얻었다고 본다. 그리고 신방과에 다녔던 것을 큰 행복으로 생각하고 있다.

동아리 생활

난 대학 생활 중 두 개의 동아리(당시엔 '클럽'이라 불렀다.)생활을 했다. 하난 고등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즐기던 등산 취미 때문에 들어갔던 산악부이고, 또 하나는 유네스코학생회(KUSA)였다. 당시엔 '바위 타기'를 꼭 영어로 불러야만 직성이 풀렸는 지 록 클라이밍(rock climbing)이라고 했는데, 그 게 사는 낙 중의 하나였다. 부모님은 나의 그 취미가 위험하다며 아주 안 좋아하셨지만, 난 고등학교 때 바위타기 경험이라곤 단 한 번도 없는 동생(순관)을 꼬여서 단 둘이 북한산의 인수봉을 오른 일도 있었다.(그곳은 전혀 걸어서 오를 수 없는 산이다.) 그에게는 집 2층 옥상에 있는 커다란 굴뚝에 자일을 걸고 하강 훈련을 몇 번 시킨 것과 자일 묶는 법 등을 가르친 것이 고작이었다. 철 들고 난 후 난 그 무모한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그 때 만약 사고가 났더라면 어떡했겠나?' 생각하며, 몸서리가 쳐지곤 했다. 경희대 산악부는 상당히 전통있는 동아리여서 훈련이 상당히 셌다. 경희대 산악부는 1964년에 우리 나라 최초로 히말라야 원정대를 파견했던 대단한 기록을 가기고 있기도 하다.(다울라기리 2봉을 6,400메타까지 올랐다. 이 때 그 원정대원 중 하나가 산악인 김정섭 씨로서 그는 여러 번 히말라야 원정대를 이끌었다. 마나슬루 봉 등지에서 그의 동생 둘이 희생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오히려 대학 산악부에서는 고등학교처럼 록 클라이밍이 적고, 트레킹(trekking)이 더 많아서 난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었다. 결국 1학년을 마치면서 산악부를 탈퇴하고 말았다. (사진: 왼편의 사진은 자일을 이용해 하강을 하는 장면인데, 당시엔 군에서 나온 방탄 재킷의 내피로 하강용 재킷을 만들었었다. 오른편은 트레킹 훈련 중의 한 때, 닉커 복커 차림이다.)

내가 더 열심히 활동한 것은 유네스코학생회 였다. 여기서는 지금까지 아주 가깝게 지내는 많은 친구들을 얻었다. 오히려 이 동아리의 동기생들이 내가 졸업한 신방과의 동기생들보다 더 가깝다고 할 정도이다. 많은 집회와 행사, 그리고 여름철의 농촌 봉사 활동 등을 통해서 난 많은 걸 배웠고, 봉사가 주는 기쁨이 뭔가도 알았다. 3학년 임원진이 되었을 때 난 '회우부장'이란 걸 맡았다. 말하자면 오락부장이다. 난 비교적 우스개 소리도 잘 하고, 노래 지도도 잘 할 수 있었으므로 내게 걸맞은 역할이었다.(사진: 좌우의 사진 모두 경북 의성으로 봉사활동을 갔을 때 찍은 사진이다. 왼편의 리어카를 잡고 있는 검정 상의의 인물이 나, 오른편 사진에서는 내가 리어카에 걸터앉아 너스레를 떨고 있다. 오른편 사진의 왼편 끝은 1년 후배로서 3대를 잇는 진짜 중국집으로 유명한 을지로 '안동장'의 사장 왕용성 씨.)

기타(guitar)와 노래

내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에 소위 '청년문화' 논쟁이 있었다. 이것은 미국의 작가 찰스 라이히가 그의 저서 [녹색 혁명] 등을 통하여 퍼뜨린 말인데, 이상하게도 그것이 한국의 대학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청년문화론] 등의 제목을 가진 관련 저서들도 여러 권이 나왔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그 당시의 한국의 청년문화(대학문화의 의미이기도 했다.)를 규정하는 3요소를 청바지, 통 기타, 그리고 생맥주로 보는 사회와 대학 내의 시각이었다. 술을 안 마시는 난 여기서 생맥주만 제외하고는 철저히 동조하는 청년 중 하나였다. 특히 난 노래하길 좋아해서 열심히 기타를 치곤 했는데, 그 건 대학에 다니던 사람들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증명하는 것과 같아서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에 난 좀 유별나게 기타와 노래를 즐겼다. 매일 기타를 쳤고, 기타의 달인인 척 베리를 좋아했다.(그는 에릭 크랩톤보다 훨씬 더 기타를 잘 치는 사람이다. 아마 에릭 크랩톤도 척 베리의 영향을 받은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척 베리는 기타의 신 중 하나니까.) 난 내가 살던 동네인 천호동에 있는 자니기타학원이란 곳에서 한동안 기타 강사를 하기도 했다.(그 학원은 내 친구의 형이 사진학원과 함께 경영하던 학원이었기에 난 기타를 가르치고, 사진을 배웠다.) 기타를 잘 쳐보려니 괜찮은 기타가 필요했는 데, 당시 미국의 포크 가수들이 사용하는 12줄 기타 소리에 이끌려서 왼편 사진(학원 조교를 할 때의 모습.)에 보이는 12줄 기타를 사기도 했다. 하지만 이 기타는 대부분의 12줄 기타들과 같이 소리가 좀 뜨는 경향이 있어서, 강한 쇳소리를 내는 기타를 다시 샀다. 이런 것이라야 마이크 앞에 섰을 때 소리가 웅웅대지 않고, 맑고 경쾌한 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나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별로 좋은 브랜드는 아니었지만 내가 원하는 소리를 내어주는 일본제 기타인 그레꼬(Greco)였다. 가격은 70년대 초반의 가격으로도 20만 원에 가까운 가격이어서 대학생이 살 만한 범위에 있지 않은 것이었으나 무리에 무리를 해서 그 걸 구했다. 줄도 만만치 않은 가격의 야마하나 깁슨 사의 제품 만을 썼었다. 이 기타는 지판이 흑단으로 되어 있고, 줄 조임쇠에 스틸 캡(steel cap)까지 달려 있는 웨스턴 스타일의 고급 기타였다. 12줄 기타는 남을 줘버렸지만 이 기타는 지금도 가지고 있으며, 아직도 그런 대로 괜찮은 소리를 내어 준다.(오른편 사진. 당시 등록금이 12만 원 정도 했던 것 같다.)

가수를 지향했던 한 때

세환 형 등의 영향으로 그렇잖아도 노랠 좋아하던 난 툭하면 여러 자리에서 기타를 치며 노랠 부르곤 했다. 후배 중에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완전히(?) 잊혀진 한 사람이 있는 데 그의 권유로 연예계 진출을 시도해 보기도 했다. 그 후배의 이름은 '박성원'이었다. 한동안 개그맨으로 TV에서 대단한 각광을 받다가 갑작스런 자살 사건으로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준 친구이다. 그는 KUSA 동아리의 1년 후배로서 아주 뚱뚱한 몸매에 얼굴이 하얀 정말 웃기는 친구였다. 그가 있는 자리에서는 그의 말 몇 마디에 모두가 폭소하느라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 친구는 '꽃만두'란 제목의 개그를 잘 했는데, 이 개그를 비롯한 몇 개의 개그가 대학가에서 크게 알려지는 바람에 TV에 자주 출연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친구는 방송에 나가느라 바쁜 중에도 동아리의 모임이 있으면 자주 나오곤 했다. 동아리에서 내가 회우부장의 역할을 하느라 노래를 지도하는 걸 보면서 그는 여러 번 "내가 형 정도의 기타 실력과 노래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난 남의 노래는 안 할 거야. 형. 이러지 말고, 형도 함께 나갑시다." 하면서 연예계 진출을 권유했다. 난 통 기타가 유행하던 당시에 여러 곳에 불려가서 노랠 부르곤 했었다.(사진: 한국일보 강당에서 있었던 다른 사람의 리사이틀에서 찬조로 노래를 부르는 모습.)

난 결국 그의 얘기를 듣고 그와 함께 현재도 가요 평론가로 활동하고 계시는 이백천 선생님을 찾아갔다. 그분은 당시에 통 기타 가수들의 대부였다. 그분에게 간단한 오디션을 받았는데, 난 그 관문을 쉽게 통과했다. 그분의 허락과 지원 약속을 받아냈으므로 나의 노력 여하에 따라 연예계에서의 성공 여부가  결정될 수 있는 것이었다. "형은 이제 풀리는 거야. 잘 되면 데뷔 시킨 나 잊지 말우." 성원이는 이렇게 말하며 좋아했다. 본격적인 연예계 진출을 위해 당시에 꼭 거쳐야 할 관문이 있었다. 당시 이백천 선생님이 명동에서 경영하던 '르 시랑스'(불어로 '침묵' - The Silence -을 의미하는 말.)란 통 기타 카페에 몇 개월간 출연해야 했던 것이다. 당시 음으로 양으로 이백천 선생님의 도움을 받던 지금 교통방송의 진행자인 서유석 씨며, 듀엣 '4월과 5월'의 백순진, 현 SM엔터테인먼트의 사장 이수만 등의 가수들은 모두 이곳에 출연했다. 나도 한동안 이곳에 출연해서 노래를 부르며 계획대로 일을 추진해 나갔다.(사진: 4월과 5월의 멤버 백순진 씨가 르 시랑스에서 사회를 볼 때 출연해서 얘기를 나누는 모습.)

하지만 생각지도 않은 한 가지 사건이 터져서 난 가수가 되기를 포기했다. 후배 박성원이 갑작스레 목을 매어 자살을 해버린 것이다. 이 사건은 나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나중에 그의 유서 내용이 밝혀졌는데, 그는 거기서 당시 통 기타 가수들을 총지휘하다시피 했던 "별이 빛나는 밤에"의 디스크 자키 이종환(현 이종환과 최유라의 ...란 프로그램 진행자) 씨의 여러 가지 부당한 행위를 낱낱이 지적하며, 그것에 항의한답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 저간의 사정이야 어찌되었던 간에 참으로 어이 없는 일이었다. 나이깨나 먹은 놈이, 가당치도 않은 이유 같은 걸 대어가며 귀한 목숨을 끊다니... 난 그 이후 모든 게 싫어졌다. 가수에 대한 꿈을 접었다. 이백천 선생님을 찾아가 사연을 말하니 "성원인 성원이고, 너는 다르잖아. 넌 잘 견디고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시며 아쉬워 하셨다. 그 이후 기타와 노래는 다시 (단지) 나의 좋은 취미 중 하나로 남았을 뿐이다.

대학 시절엔 신방과 입학동기인 김종학("모래시계" 연출자)이 때문에 몇 개의 연극에 참여해 보기도 했다. 이근삼 선생의 도깨비 재판이며, 제5병동 등의 여러 연극에 심취했던 것이다. 어떤 때는 배우로 출연하고, 어떤 때는 스탭으로 일했다. 종학이는 이미 휘문고등학교의 연극부장 출신으로 대학 시절에 여러 개의 연극을 감독하면서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그려가고 있었다. 그 시절엔 디머(dimmer/조명이 어둡게 변하게 하는 장치)가 없어서 소금독이란 걸 썼었다. 독에 소금물을 넣고, 거기에 커다란 동판 두 개를 넣으면 그것이 반응을 일으키면서 전기 저항이 커져서 전기불이 점점 꺼지게 하는 장치였다. 지금 연극인들은 그 얘기를 들으면서 무척 신기해하기도 한다. 그 땐 '연극이나 해볼까?' 하는 생각으로 산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 때의 정열로 지나가 버렸다.(종학인 계속 그 길을 걸었고, 경희대 신방과가 가장 자랑스런 동문상을 줄 때, 그가 그 주인공이 되었다. 참 질긴 놈이다.)

대학 시절에도 겨울이면 열심히 스키를 탄 것과 하키 스케이팅을 즐긴 것이 기억에 남는다. 추위를 무척이나 타는 성향이었음에 도 불구하고 난 겨울을 참으로 좋아했다. 겨울을 워낙 좋아해서 죽은 순문 형에 대한 기억이 그 때도 많이 나곤 했다. 왜냐하면 내 형은 당시의 나보다도 어린, 대학에 들어오기 직전의 19세 나이에 죽었기 때문이다. 난 그의 삶까지 덤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왼편의 사진은 군에 갔다온 후인 77년의 사진이다. 내가 스키를 타면서도 스키에 대해 연구에 가까운 태도로 공부를 했다는 증거가 되는 사진이다. 내가 펜까지 들고 열심히 읽고 있는 책은 프랭크 코비노가 76년에 펴낸 책 [Skier's Digest]이고, 펼쳐져있는 것은 쟝 끌로드 낄리의 스키어에 대한 조언들이 있는 쪽(page)이다.(왼쪽 책장이 낄리의 사진 아닌가?) 진정한 스키어는 단지 스키를 행동으로 즐기는 것에 그치지 말고, 그 운동에 대한 깊은 주변 지식도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난 대학 신입생 시절부터 상당히 많은 스키 관련서들을 읽어 댔다. 이런 것은 모두 고교 시절 보이 스카웃 생활을 하면서 배운 생활 태도(사전 준비) 중 하나인데, 난 스키에 앞서서 등산을 할 때 철저히 이런 태도를 견지했다.(그 덕에 나중에 4권의 스키 책을 발간했다.)

오른편의 사진은 ROTC 시절의 모습 중 하나이다. ROTC복을 입은 사진은 거의 없는데,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는 사진이라서 당사자가 나중에 보내온 것으로 생각된다. 난 ROTC 훈련을 몇 개월 받다가 사병으로 자원입대했다. 그 얘긴 '군'에 관한 것이므로 '군대 시절'에 관한 글에서 써보려 한다.

어떤 면에서 난 70년대의 암울한 시대 상황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김민기가 아침이슬을 작곡하고, 나와 같은 71학번의 양희은이 그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그것이 금지곡으로 묶였던 어이없는 폭압의 시절이다. 하지만 그런 저항의 노래는 내게 단지 아름다운 노래 중 하나였을 따름이었다.(노래를 부른 이조차도 그 노래가 시대로 인하여 의미가 덧붙여지고, 그것이 국민 가요가 된 것에 대하여 의아해 한 일도 있지 않은가?) "내게 대학에 다니는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처연한 심정을 표현했다는 청계 피복 노조의 전태일이 나의 삶과 같은 반경에 있음을 알지 못했다. 또, 나의 대학 생활 전체에 걸쳐서 학기마다 몇 번씩 일어나곤 했던 대정부 데모는 단지 그 뜻은 좋으나 파괴적인 과정이 싫어서 단 한 번도 참여해 본 일이 없다. 앙가주망(참여)을 제일로 하는 인텔리겐차들에게 지탄 받을 일이나, 난 단 한 번도 그같은 행동에 대하여 후회해 본 일이 없다. 난 단지 나 답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시 정외과에 다니던 입학동기 정범구(현 국회의원)의 꼬임에 빠져서 한동안 의식있는 행동을 한답시고, 인촌 김성수 선생의 묘 앞에서 모여 시대를 걱정(?)한답시고 모의를 하던 일도 있긴 했지만... 내가 고교 시절과 대학 시절에 자주 들르던 청계천의 고서점들과 운동구점 바로 위의 어두침침한 공장에서 전태일이 미싱을 돌리며 섬유 부스러기의 컬컬한 먼지를 들여 마시고 있으리라곤 꿈에도 몰랐다.(아이러니컬하게도 난 그곳에 [스키], [스킹] 등 미 8군에서 흘러나오는 잡지를 사러 가곤 했다.) 아마도 그는 내가 산 기타 값 정도만 있었더라도 대학 한 학기 등록금과 생활비를 충당했을 것이니 그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누구나 지난 세월은 아름답게 채색되기 마련이다. 내게도 그렇다. 물론 이 짧은 지면이 나의 모든 대학생활을 그려줄 수는 없다.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일에 대해서만 묘사되었을 뿐이다. 특히 앨범을 들췄을 때 내 눈에 띤 몇 개의 사진을 중심으로 써 본 것이니 사진에 남지 않은 모든 일들은 여과(filtering)되고 없다.

"대학 시절." 이 글은 내가 대학에 입학해서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에 입대하게 된 2년 반의 기록일 뿐이다. 난 자랑스럽게, "그 시절을 더 할 수 없을 정도로 열심히 살았다."고 말할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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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는 얘기 나의 대학 생활 - 동문회가 퍼 간 나의 글.^^ file 박순백 2017.09.06 379 2
2572 사는 얘기 만날 사람은 언제든 만나게 된다. file 박순백 2017.09.03 442 1
2571 잡담 꼬마 예린이의 굽네 치킨 TV CF 4 file 박순백 2017.09.01 477 0
2570 잡담 꼬마 예린이의 LG 전자 TV CF 2 file 박순백 2017.08.27 610 0
2569 잡담 여름 휴가 Ver.2 - 세 째날 두 번째 글 - 결국 사흘간의 청간정 공부 file 박순백 2017.08.27 418 3
2568 잡담 여름 휴가 Ver.2 - 세 째날 첫 글 - 청간정 시(1654년)를 쓴 할아버지 박길응 4 file 박순백 2017.08.26 372 1
2567 칼럼 교육, 다양한 공부취향, 성격유형에 맞게 이루어줘야 2 최재원 2017.08.26 188 1
2566 잡담 여름 휴가 Ver.2 - 둘 째날 - 고성 청간정과 송지호 Surf 61 4 file 박순백 2017.08.24 444 1
2565 잡담 여름 휴가 Ver.2 - 첫 날 - 지피지가와 커피커퍼 file 박순백 2017.08.23 498 1
2564 사는 얘기 인연 5 file 박순백 2017.08.19 787 3
2563 문화 영화 공범자들을 본 후에 쓴 후기이자 반성문.-_- 23 file 박순백 2017.08.16 17607 17
2562 취미 조슈아 벨과 영화 Ladies in Lavender(and its OST) 1 file 박순백 2017.08.13 185 2
2561 취미 제 페이스북 친구의 숫자가 들쑥날쑥하는 이유 - 매일 페삭 처리 2 file 박순백 2017.08.11 248 2
2560 취미 경계에 실패한 것과 같은 커피 로스팅 14 file 박순백 2017.08.06 118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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