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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책장 속에 꽂혀있던 빛 바랜 책을 펴보는 것! 


아주 잠시인 거 같은데 벌써 몇 년 전이다. 이생진 시인을 뵈었던 기억이. 황금찬 시인의 시비를 양양 낙산해수욕장 어귀에 세우고 기념식을 갖는데 오셨다. 이미 몇 번 뵈었던 뒤였고, 황금찬 시인이나 조병화 시인과도 오랜 교분이 있던 터였기에 나로서도 참으로 반가운 만남이었다.
두 분 원로시인을 모시고 몇 사람 문우들과 밤 늦도록 설악해수욕장 인근의 횟집에서 제법 많은 양의 술을 마시며 말씀을 들을 기회가 되었었다.
당시 문학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양양군에 황금찬 시인의 시비를 세운다는 일은 여러 난관과 우여곡절도 많은 일이었다. 황금찬 시인의 고향에 대한 문제부터 시작해, 예산부분이나 여러가지 난관을 극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문화관광과와 당시 양양군수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성사되었다.
그런 기억을 떠 올리며 처음으로 이생진 시인의 행사엘 찾아가 뵈었기에 몇 장의 사진을 뒤적이던 중, 생전의 조병화 시인과 함께 촬영 된 이생진 시인의 사진이 있어 책장을 찾아보니 시인의 시집도 그대로 꽂혀있다. 이 시집을 구입한 것이 1999년 말인가, 2000년 초인가 기억에 가뭇하다.
당시 잠시 밖에 나갔던 길에 친구를 기다리다 길옆 서점이 눈에 띄어 「그리운 바다 성산포」로 세간에 널리 알려지신 이생진 시인의 시집을 한 권 구입을 하게 되었다. 제목은 「그리운 섬 우도에 가면」이라는 시집이었다. 여기에는 「그리운 바다 성산포<동천사 간>」으로 하여 알려진 「무명도」가 노래로 만들어져 낭송과 함께 CD가 함께 들어 있었다.  
 DSC_8063.JPG


무명도(無名島)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뜬 눈으로 살자  
 
사실 이 시집에는 위의 시 외에도 이전의 시집에 실렸던 다른 시들도 여러 편 눈에 띈다. 「바다를 본다」, 「설교하는 바다」, 「술에 취한 바다」, 「넋」 등이 그 시들이다. 여기 그 시들을 옮겨 본다. 
 
 
 
파도는 살아서 살지 못한 것들의 넋 
파도는 살아서 피우지 못한 것들의 꽃  
 
지금은 시새워할 것도 없이 
돌아선다  
 
사슴이여 살아 있는 사슴이여 
지금 사슴으로 살아 있는 사슴이여 
저기 저 파도는 사슴 같은데 
산을 떠나 매 맞는 것 
저기 저 파도는 꽃 같은데 
꽃밭을 떠나 시드는 것  
 
파도는 살아서 살지 못한 것들의 넋 
파도는 살아서 피우지 못한 것들의 꽃  
 
지금은 시새움도 없이 말 하나 않지만  
 DSC_8075.JPG


성산포를 성산포이게 만드는 시인의 힘, 아이들을 훈육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교장도 바다를 보고, 세상의 질서를 위해 일하는 지서장도 바다를 본다. 평생 보고만 사는 시인도 바다를 보건만 그러나 실상은 바다가 더 많이 품고 바라본다. 
 
바다를 본다  
 
성산포에서는 
교장도 바다를 보고 
지서장도 바다를 본다 
부엌으로 들어온 바다가 
아내랑 나갔는데 
냉큼 돌아오지 않는다 
다락문을 열고 먹을 것을 
찾다가도 
손이 풍덩 바다에 빠진다  
 
성산포에서는 
한 마리의 소도 빼놓지 않고 
바다를 본다 
한 마리의 들쥐가 
구멍을 빠져나와 다시 
구멍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바다를 본다 
평생 보고만 사는 내 주제를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나를 더 많이 본다 
 DSC_8145.JPG


이제 바다는 교회의 목사에게 설교를 한다. 기도보다 간절한 염원을 조용히 품고, 꽃보다 더 섬새하게 설교를 한다. 
 
설교하는 바다  
 
성산포에서는 
설교를 바다가 하고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 
기도보다 더 잔잔한 바다 
꽃보다 더 섬세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바다가 더 
잘 산다 
 
시인의 시는 담담한 관조의 멋이 있는데, 아마도 시인의 연륜이 그러하게 하였으리라. 이생진 시인은 외모에서도 편안하고 담백한 인상을 느끼게 하는 그런 시인이다.  
 
2000년 초여름 조병화 시인의 시비 제막을 겸하여 시낭송의 밤을 준비하여 뵙게 되었을 때, 시인께서는 만나는 사람마다 다정하게 손 잡아 주시곤 전혀 거부감 없는 모습으로 독자들이 내놓는 책에 서명을 하여 주셨다. 사실 어느 정도 알려진 시인 중에서 간혹 독자들에게 ‘거만하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경우를 보아 왔기에 ‘역시 시인도 연륜에 따라 넉넉하고 편안하게 사람들을 대하는 구나’라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편안함은 시인의 시 속에 그대로 녹아 흐르고 있고, 다른 그 어느 누구도 이생진 시인만큼 제주도, 그 중에서도 우도와 성산포를 사랑하고 아끼는 이 없을 만큼, 우리에게 우도와 성산포에 대하여 따스하며서도 싱그럽고 순박한 꿈을 꾸게 하고 있다. 바로 「만년필」이라는 제목으로 쓰여진 시인의 시처럼 말이다. 
 
만년필  
 
성산포에서는 
관광으로 온 젊은 
사원 하나가 
만년필에 
바닷물을 담고 있다  
 
그렇다. 시인은 바로 이 사원처럼 우리에게 만년필에 잉크가 아닌 바닷물을 담아 시를 써서 전하고 있는 것이다. 푸르되 전혀 물 들지 않을 순수함! 그 푸르름을 말이다.  
 DSC_8149.JPG


시인의 시는 이렇게 단순한 듯 하면서도 깊은 뜻과 독자에게 전하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 이번에는 시인의 시 중에서는 장편시에 속하는 「 그리운 바다 성산포」를 한 번 보기로 하자. 「육십평생 두고두고 사랑하다 다 사랑하지 못하고/또 기다리는 사람.」으로 그려지는 시인의 모습을 생각하며 말이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빈 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은 
그 빈 자리가 차갑다 
나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 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도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을 놈의 고독은 취하지도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움이 없어질 때까지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수는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슬픔을 만들고 
바다는 그 슬픔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슬픔을 노래하고 
바다는 그 슬픔을 듣는다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죽는 이를 못보겠다 
온종일 바다를 바라보던 그 자세만이 
아랫목에 눕고 
성산포에서는 더 태어나는 이를 못보겠다 
있는 것만으로 족한 존재 
모두 바다만을 보고 있는 고립 
바다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 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 집게는 하품이 잦아 있었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께 나타난 버스에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은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술을 좋아하던 사람은 
죽어서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은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한 짝을 놓아 주었다 
삼백육십오 일 두고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이 
육십평생 두고두고 사랑하다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DSC_8154.JPG


2015년 4월 24일 저녁 인사동 ‘순풍에 돛을 달고’에서 뵌 시인께서는 예의 조용하며 사람의 마음 따뜻하게 어루만질 줄 아셨다. 그러나 덜컹이며 돌아간 세월도 이제 시인 앞에서 무력해지고, 다만 시인은 지금도 그 아름다운 영혼의 고향인 바다와 우도, 그리고 성산포를 그리워하고 아낌없이 사랑을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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