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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그리 다급한지 모르겠으나 봄은 잰걸음으로 달려온다. 바람이 아무리 시샘을 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기어코 오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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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1리 마을사업에 대한 정리나 자료들을 준비하는 틈틈이 자료를 찾기 위해 하는 책읽기가 아닌 나름의 또 다른 책을 손에 든다. 마을사업과 관련된 자료야 다른 고장의 사례들을 인터넷 검색 등을 통해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나름의 자기 철학이 없이 남들이 하는 일을 보고 그것을 통해 전략을 짠다면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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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 나름의 무한한 가능성을 만날 수 있다. 서점을 들려 직접 구입한 책도 있으나 간간이 아는 분들이 펴낸 책을 보내주어 읽기도 한다. 며칠 전 평소 정을 나누며 그간 존경해마지않던 정운현 선배께서 중년에 닥친 실직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해 펴내신 책을 보내오셨다. '나에게 불쑥 찾아온 중년의 실직, 망가지지 않고 당당하게 사는 18가지 방법'이란 부제가 붙은 <어느 날 백수(白手)>라는 책이다.

 

20년 이상 서울에서 생활을 했던 입장에서 불현 듯 일을 하지 못 하게 되었을 대의 당혹스러움과 절망이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 공감한다. 하지만 혼자일 때 스스로 직장을 버렸던 입장이라 부양할 가족이 있는 경우에 갑작스럽게 닥친 실직의 불편함까지는 경험이 없어 잘 몰랐다. 물론 최근에야 실직 아닌 실직 상태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다 보니 선배님의 책에서 하시고자 하는 이야기를 충분히 공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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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보면 한 권의 책이 아닌 또 다른 책을 책장에서 꺼내게 된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을 꺼내게 만들고 <주역>을, 다시 <논어>에서 다산 정약용 선생과 관련 된 여러 책들을 꺼내게 만든 책이 정운현 선배께서 보내신 책의 힘이다.

 

다산초당에서 수학한 제자 18인 중 한 사람인 윤종심(尹種心)에게 보낸 ‘가난을 걱정하지 말라’는 글을 다시금 살펴 마음에 담게 된 것도 정운현 선배께서 보내주신 책 덕분이다.


“가난한 선비가 정월 초하룻날 앉아서 1년 양식을 계산해보면, 참으로 아득하여 하루라도 굶주림을 면할 날이 없을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그믐날 저녁에 이르러 보면, 의연히 여덟 식구가 모두 살아 한 사람도 줄어든 이가 없다. 고개를 돌려 거슬러 생각해보아도 그러한 까닭을 알 수 없다. 너는 이러한 이치를 잘 깨달았느냐? 누에가 알에서 나올 만하면 뽕나무 잎이 나오고, 아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 울음소리를 한 번 내면 어머니의 젖이 줄줄 아래로 흘러내리니, 양식 또한 어찌 근심할 것이랴? 너는 비록 가난하다고 하나 그것을 걱정하지는 말라.”

 

-정약용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315쪽

 

다산 정약용 선생에 관련된 책이 몇 권 있는데 그중엔 1992년인가 황인경 소설가가 지은 <소설 목민심서>도 있고, 정민 교수의 책이 있다. 그중 정민 교수가 펴낸 <다산의 재발견>은 한순간에 읽어지는 책이 아니라 몇 번이고 거듭 읽고 마음 바탕에 그림을 그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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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정신을 맑힐 겸 눈 덮인 골짜기로 꽃을 찾아 나선다. 역시 산자락에서는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걸로는 복수초를 빼 놓을 수 없다. 나무로야 생강나무가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데, 실상 따지고 보면 오리나무와 박달나무가 아닐까 싶다. 꽃같이 보이지 않을 뿐 분명 씨를 맺을 꽃이 틀림없는 아주 작고 볼품없는 꽃을 긴 애벌레 같은 짙은 암갈색의 수꽃 송이들이 주렁주렁 달린 밑 부분에서 피우며 봄을 맞는다.

 

그리고 진달래가 피기 시작하면 눈에 잘 띄지는 않으나 괴불나무도 한 몫 거들고 나선다. 토우슈즈를 신은 발레리나처럼 꽃술에 나풀거리는 잎을 달고 피는 괴불나무의 꽃은 찾기는 어렵되 만나면 넋을 놓게 된다.

 

살며 느끼는 바지만 땅은 대관절 어떤 부분에 저리 고운 색소를 숨겨두었는지 봄이면 어김없이 찬란한 꽃들을 피워낸다. 희고 노란 꽃들은 물론이고, 분홍과 보랏빛 꽃들로 가득한 봄날의 들판은 땅이 화사하게 꽃등불 밝힌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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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이었던 것 같다. 그해 이른 봄 쿠바노 리브레(Cubano Lebre : 자유쿠바인)를 목적으로 피델 카스트로를 도와 혁명을 주도했던 젊은이의 이야기에 끌렸던 기억을 해냈다. 그의 삶을 담은 책을 다시 구입해 봄날 들꽃을 찾아나서는 길에서 줄곧 손에 들고 다녔다. 마지막 순간 두 눈을 부릅뜨고 세상을 떠난 혁명가 체 게바라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의 행적은 이 계절과 참으로 많이 닮았다 생각했다.

 

그는 피델을 도와 쿠바혁명을 성공했다. 쿠바시민권과 쿠바공산당의 당원이라는 자격이나 혁명정부의 장관직으로 편한 여생을 살 수 있음에도 모두 버리고 또 다른 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떠났던 체의 모습은, 봄들을 들불처럼 환하게 밝히던 꽃들이 다시 새로운 봄을 향해 침잠하는 모습 그대로다.

 

올 2월 하순, 그때도 책을 읽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너무 좋아 불현듯 일어섰다.

 

맡은 일이 있으니 자료를 만들고 정리하느라 잠은 부족했다. 하지만 아직은 얼음이 서걱거리는 동토(凍土)기는 하나 분명히 복수초가 피어있으리란 믿음으로 양지쪽을 찾았다.

 

꽃을 찾아 숲으로 들어서 오래지 않아 제대로 돌보지도 않는 누군가의 무덤가에 이미 할미꽃이 솜털 보송한 싹을 틔우고, 생강나무가 제법 튼실하게 꽃망울을 맺은 게 눈에 띤다.

 

얼음 녹은 물, 높은 산 눈 녹은 물이 시리도록 투명하게 돌돌거리는 도랑을 건너면 이내 솔숲으로 난 길이 있다. 얼마쯤 거슬러 오르다 다시 도랑을 끼고 조금 더 깊이 들어가자 온통 환하게 노란 들불이 켜진 듯 복수초들이 피었다.

 

설악은 복수초를 1월부터 4월 하순까지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불과 200여 미터 남짓 되는 거리에서도 꽃이 피는 순서는 보름씩 차이가 나기도 한다. 때로는 한 달 이상 차이가 날 때도 있으나 조금 더 높은 곳으로 향해 거침없이 거슬러 오르며 꽃들이 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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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초(福壽草), 우리나라에서 수선화와 더불어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식물들 가운데 하나다.

 

복수초는 ‘가지복수초’, ‘개복수초’, ‘복수초’, ‘연두복수초’, ‘애기복수초’, ‘연노랑복수초’, ‘은빛복수초’가 있다.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복수초는 눈 속에서 핀다 해서 ‘눈새기꽃’이나 ‘얼음새꽃’으로도 불린다.

 

최근 개화 시기는 제주도와 강원도 동해시, 양양군에서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것으로 야생화를 촬영하는 이들에 의하여 밝혀졌다. 매년 1월 5~10일 사이면 어김없이 개화소식이 전해진다.

 

그런데 이 복수초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늦봄에 꽃을 피운다고 나와 있다. 그건 아마도 서울근교 천마산을 기준으로 본 탓으로 보인다.

 

서울에 사는 이들이 하는 말이 있다. 강원도 산다고 하면, “거기 엄청 춥지요?” 하고 말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강원도도 영동지역은 부산과 비슷한 기온을 보인다. '춥다.'로 대변되는 곳은 인제군 서화면, 양구군, 철원군, 화천군 일대다. 물론 인제군과 춘천시, 홍천군, 원주시, 정선군, 태백시 등도 비교적 추운지역에 속하지만 경기권과는 별반 차이가 없다. 이미 영서지역도 높은 지대를 빼 놓고는 봄이 한창 시작되긴 마찬가지다.

 

간혹 이런 질문을 받는다.

 

“야생화를 많이 아신다고 하던데 정말 눈 속에서도 꽃이 피나요?”

 

그렇다 눈 속에서도 꽃은 핀다. 엄밀히 말하면 눈이 오는 중에도 꽃이 피어있는 생강나무나 진달래 같은 꽃도 있고, 그렇지는 않으나 복수초와 얼레지나 노루귀 같은 봄꽃은 눈이 녹기 시작하고 햇살이 비쳐들면 꽃봉오리를 활짝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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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이곳 오색엔 눈이 내렸다.

 

높은 산에만 내린 것이 아니라 오색초등학교 운동장에도 하얗게 덮일 정도로 내렸다. 그러나 비가 내리다 눈이 내렸고, 양도 그리 많지 않을뿐더러 기온이 영하로는 내려가지 않아 포근한 탓에 이내 녹고 말았다. 조금 더 내려주면 눈 속에 핀 복수초를 누구나 이곳을 찾아오면 만날 수 있게 안내라도 해주련만 아쉽다. 자연이 하는 일이 언제 사람들 마음대로 되던가에 생각이 미치자 미련 접었다.

 

복수초를 만나러 나선 길에서 얼레지와 양지꽃도 핀 걸 만났다. 며칠 안쪽으로 산자락마다 얼레지 온통 환하게 발 디딜 틈 없이 핀다. 계곡엔 이미 돌단풍이 한창이고 집 앞 벚나무도 벌써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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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자연과 더불어 살게 되면서 나름 자연전도사 같은 일을 하게 되었다. 때로는 제법 넓은 땅만 있다면 산과 들의 풍경을 그 땅에 조성하면 좋겠단 생각도 한다. 결과적으로 그런 흥미가 종종 몇 곳에 작은 생태공원을 조성할 기회로 주어졌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다. 이참에 마을 전체를 생태공원으로 탈바꿈시킨다면 또 다른 문화자원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삶의 희망을 잃었던 이들에게 한 줄기 빛과 같은 꿈을 꾸게 할 수 있는 조건은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하는 것이다. 사람 개개인도 그렇지만 ‘마을’이라는 단위도 마찬가지다. 자원이 없다는 푸념을 할 게 아니라 자원은 있는 그대로를 활용할 때 드러나는 것 아닌가.

Comment '1'
  • profile
    Dr.Spark 2014.04.14 12:02

    초봄의 눈까지 뚫고 올라오는 강한 생명력,

    정말 대단합니다.

    게다가 노랑색이라서 배경(흰색과 검정)과

    극명하게 대비되어 튀어 보이는 것도 멋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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