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 시절

내 중학교 시절은 형의 죽음과 함께 시작되었다. 정말 오래전의 일이다. 난 65년에 중학교 1학년이었는데, 형은 내가 중학생이 되기 직전 겨울에 스케이팅을 하다 죽었다. 깨진 양어장의 얼음판 밑으로 가라 앉은 형의 스케이트가 바닥의 뻘흙에 박혀 헤어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형은 대학 입시를 앞둔 상태에서, 나는 중학 입시를 앞둔 상태에서, 그처럼 믿기 힘든 우리의 영원한 이별이 시작되었다. 분명 이별하였으되 혈육과의 진정한 이별이 없다는 것을 난 금새 알아 차렸다. 육신의 사라짐이 이 세상에 한 때 존재했던 이에 대한 모든 흔적을 말소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짧은 생애 동안 보여준 행동들 하나하나가 33년이란 긴 세월, 정말 무엇이라도 잊혀질 만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부모님의 뇌리에, 나의 뇌리에, 내 동생들의 뇌리에 생생히 살아 있어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심지어는 그를 아꼈던 주위 사람들의 기억 속에도 아직까지 그가 살아있음을 발견할 때마다 난 새록새록 그 슬픔의 깊이가 더해 옴을 느끼기도 한다.

떠난 사람에 대해서는 좋은 기억만 남게 된다. 하지만 형에 대해서는 아무리 평가절하를 해보려해도 그 게 불가능함을 느낀다. 그와 함께 할 때 그에 대하여 가졌던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은 그를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내 스스로 잘 못이었음을 깨달았고, 내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이보다 훨씬 어른스럽게 행동하고, 짧은 인생을 당차게 살았던 그의 존재는 내 마음 속에서 오히려 더욱 빛을 발하게 되었다. 나아가 그가 살았던 햇수보다 더 많은 시간들을 맞으면서 난 형의 모든 능력과 마음씀씀이와 부모님에 대한 그의 효성, 그리고 동생들에 대한 맏이로서의 의무감에 대하여 감탄하곤 했다.(사진: 형의 고등학교 시절 사진. 왼편에서 두 번째가 내 형 '순문(淳文

)'이다.)

위의 사진은 형이 죽은 후 부모님이 모든 사진을 없애 버렸는데, 우연히 조그만 사진 하나가 눈에 띠기에 내가 몰래 보관해 두었던 것이다. 몇 년전 어머님의 앨범 속에서 증명 사진 만한 형의 사진 하나가 눈에 띠었다. 어머니도 모든 사진을 태운다고 하셨지만 어딘가에 섞여있다가 눈에 띤 그 사진까지 다시 태우진 못하신 것 같다. 이제 70세 후반의, 생의 마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내 어머니가 지금 내 나이의 반도 안 되던 젊은 시절에 얻은 큰 아들이 내 형 순문이었다. 왜 세월마저도 그런 슬픔은 삭힐 수 없단 말인가?  이럴 땐 정말 '저승'이란 것이 있어서 한 때는 한 몸이었던 그 두 모자가 함께 만나 손을 부여잡고, '이승'에서의 오랜 - 저승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오래'란 시간의 의미를 떨쳐 버린 채... - 해후의 기쁨을 만끽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는 어린 시절의 내게 적이기도 했고, 우상이기도 했다. 그의 모든 방면에서의 탁월함 때문에 나는 언제나 기가 죽어 지냈고, 그와 비교되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그를 마음 속의 적으로 삼고, 정신적으로나마 그를 눌러보려고 했었다. 그 때마다 난 오히려 처절한 패배의식만을 느끼고 말았을 뿐이다. 일찍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에게 "피지도 못하고 졌다."는 말을 하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짧은 생을 누린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꽃처럼 살다 간다. 남들이 평생을 태울 연료를 그들은 단시간 내에 모두 태우고 아스라한 불꽃으로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 안타까움을 남기며 사라진다.

난 형에게 못미칠 바에는 그와 경쟁하기보다는 내 식대로 살기를 고집했었다. 왜 세상을 많이 살아보지도 못한 어린 녀석이 그렇게 엇가는 생각으로 살았는 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리지만 하나의 존재임을 깨닫고 나름대로 자신의 신원을 모색하며, 못된 어른들이나 할 수 있는 생각을 그 시절에 했던 것 같다.

난 신당동에 있는 광희중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국민학교 때 워낙 놀기에 바빠 공부를 안 했기에 그 학교는 내 실력에 맞춰 갈 수 있는 많지 않은 학교 중 하나였다. 그 학교는 매우 좋지 않은 환경을 가지고 있는 학교였다. 학교의 남쪽 담 옆길 건너편에는 철공소 등이 많아서 항상 소음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 뒤는 신당동 시장이었다. 그리고 북쪽 담 바로 옆에는 미처 복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청계천의 구정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청계천변에는 당시까지도 전쟁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소위 전후의 판자촌이 그 천변을 따라 줄지어 있었던 것이다.(그 부근은 동대문 전차 종점이 있기도 했다.) 특히 그 판자촌은 당시에 서울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창녀촌이었다. 길을 지나다보면 길가에 나와있는 '아프레 걸'(Apres girls)들이 길가는 이들의 소매를 잡아채는 것은 물론 심한 경우는 중학생의 모자까지 잡아채어 그 판자집으로 줄행랑을 치는 장난까지 했다.(사진: 중학교 1학년 소풍 때 어머니와 함께. 내가 어머님의 키보다 작았던 시절.)

맏이가 죽어 둘 째인 내가 맏이가 된 후 어머님은 나를 위해 극진한 정성을 쏟으셨다. 어머니는 소풍 때마다 함께 나를 데리고 다니셨고, 작은 일에 지극한 관심으로 지켜보시고, 도움의 손길을 펴시곤 했다. 그 건 전에 없던 일이었다. 물론 어머니가 전에 내게 무관심하셨다는 것은 아니나, 그 관심의 도가 전과 비교할 때 엄청나게 커졌다는 것이다.(어머님은 심지어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까지도 소풍에 따라 오실 정도였는데, 내 친구들이 "야, 고 3 놈이 소풍에 엄마를 모시고 오냐?"고 핀잔을 주었을 때도 난 아무렇지도 않게 느낄 만큼 '마마 보이'가 되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언젠가는 어머님께 부득이한 일이 생겨서 소풍을 못 따라간다고 하셨는데, 난 혼자는 안 가겠다고 버텼고, 결국 어머님은 그 일을 취소하고 함께 소풍을 따라 나서신 일도 있다.)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스케이팅을 하는 것이었다. 형에 관한 다른 글에서 썼듯이, 형은 운동의 귀재였는데, 스케이팅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의 멋진 스케이팅 솜씨를 보면서 썰매타기로 만족하고 있던 난 '중학교에 들어가면 스케이트를 사 달래야지.'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형의 죽음과 함께 그런 기대는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이유없이, 그 운명의 날 양어장 옆 풀밭에 뉘어진 형의 스케이트에 달라붙어 있던 붉은 색 진흙이 상기되곤 했다. 그 스케이트는 형과 함께 묻혔다. 난 중학교에 가면 스케이팅을 하겠다던 내꿈까지 형과 함께 묻힌 것이란 사실까지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형을 잃은 슬픔보다도 그런 기회를 잃는다는 게 아쉬웠다는 것은 형에 대한 도리는 아니겠지만, 난 형의 죽음이 나의 그같은 기회를 앗아간 것에 대하여 분노하는 일도 있었다.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광희중학교에서 몇 백 메터 정도의 거리에 당시 우리 나라에서 유일한 동대문 실내 스케이트장이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워낙 스케이장이 가깝다 보니 한 학기에 몇 번 정도는 체육 실기를 스케이트장에서 한다는 것이었다. 그 건 어차피 학과목에 속하는 것이니 따라야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리숙한 난 그 사실을 집에 얘기하지 못했다. 스케이트를 타야한다고 말하면 경위야 어쨌던 간에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아서였고, 또 그런 얘기로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 한 번은 스케이트장에 갔지만 스케이트조차 대여하지 않았다. "난 형이 스케이트를 타다 죽었기 때문에 집에서 못 타게 해."라는 말에 친구들은 물론 체육 선생님마저 혀를 끌끌차며 "그럼 스탠드에 앉아서 구경이나 해라."고 말했다. 친구들 중 대부분은 스케이트를 처음 배우는 것이었기 때문에 무척 즐거워하고 있었지만, 난 그들이 부럽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스케이트는 나와 상관 없는 운동이다.'라는 생각이 나를 그렇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로 스케이트장에 갔을 때 난 뭔가 큰 손해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형은 형이고, 나는 나란 생각이었다. 내가 죽은 형 때문에 손해를 볼 수는 없다는 것이었고, 이러다간 손해만 보고 살 것 같다는 데 까지 생각이 미쳤다. 당장 스케이트를 롱(long)으로 빌려서 타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딱히 나를 위한 운동처럼 느껴질 정도로 재미있었다. 스케이팅에 재미를 붙인 친구 몇 명을 모아 두 번째로 갔을 때는 좀 더 잘 탈 수 있었다. 스케이팅을 하면서 보니 환상적으로 잘 타는 학생들도 많았다. 알고 보니 그들은 아이스하키 선수들이었는데, 이들의 스케이팅은 정말 현란하기 짝이 없었다. 어느 정도 실력이 붙게 되자 난 하키 스케이트를 하나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때까지는 내가 스케이트를 배웠다는 사실을 부모님은 알지 못하고 계셨다.

엄한 아버님을 워낙 무서워했던 지라 난 나의 영원한 후원자인 어머님께 이러저러한 이유로 스케이트를 배웠노라고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상당히 놀라시면서도 한 편 대견해 하셨다. 그러면서도 스케이트까지 사서 열심히 스케이팅을 하겠다는 내 생각에는 반대를 하셨다. 당시엔 동대문 실내 스케이트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강이나 논, 혹은 양어장 같은 곳이 얼면 그 자연빙 위에서 스케이팅을 하는 것이었으므로 그 위험성을 두려워하셨던 것이다. 난 비교적 논리적으로 어머님을 설득하였다. 위험하다고 그런 거 안 하다 보면 난 이 담에 분명 바보가 될 것이다. 친구들이 모두 할 줄 아는데 어머님의 아들만 그런 걸 못 해서 멀뚱히 눈뜨고 지켜보고 있기를 원하시느냐, 형은 이미 간 사람이고, 난 산 사람이다. 맏이었던 형에게 해주셨던 것처럼 내게도 남들보다 더 많은 새로운 기회를 주셔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런 항변에 대하여 어머님은 "그럼 스케이트를 타더라도 꼭 동대문 스케이트장에서 타야만 한다. 절대로 양어장 부근엔 얼씬도 말아야 한다."는 당부와 함께 아버님께 말씀을 드리겠다고 하셨다.

그제야 난 하키 스케이팅의 세계에 입문할 수 있었다. 거의 매일 학교가 파하면 난 동대문 스케이트장으로 갔다.(그 때의 애로사항은 학교와 스케이트장의 중간 지점이 위에서 언급한 문제의 판자촌이라는 것이었다. 청계천을 가로 지르는 다리 하나가 그곳에 있었는데, 나도 그 다리에 진을 치고 있던 한 언니(?)가 모자를 잡아채는 바람에 그 판자집까지 쫓아가 한동안의 싱갱이를 하고, 모자를 찾아온 일도 있었다.) 얼마 안 가서 난 스케이트를 꽤 잘 타는 편에 속하게 되었다. 그래서 동생까지 끌어 들였다. 동생을 동대문 스케이트장까지 데려가기가 힘들어서 부모님 몰래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얼음판에 갔다. 그곳은 벽돌 공장에서 오랫동안 흙을 파서 생긴 거대한 호수와 같은 곳이었다. 문제는 그 옆이 형이 죽은 양어장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난 양어장에서의 스케이팅 만은 안 된다는 어머님의 말씀에 따라 양어장에는 가지 않았다. 모든 면에서 나와 비슷했던 내 동생도 곧 스케이팅에 능숙하게 되었다. 꼬리가 길면 밟히게 마련이라, 결국 이 모든 게 들통이 났다. 화가 난 어머님의 야단을 한참 맞아야 했지만, 이미 우리 형제는 스케이팅 광이 되어 있었고, 화가 풀린 어머님을 졸라 동생의 스케이트도 샀다.(동생과 나는 지금까지도 스케이팅을 즐긴다. 동생은 매주 집에서 가까운 롯데 월드 스케이트장에 가서 스케이팅을 하고, 나도 집은 멀지만 자주 그와 어울리는 편이다.)

중학교 시절 내내 난 너무나도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아무도 내가 하는 일에 간섭을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무슨 일에나 항상 야단을 맞고, 착한 아이가 될 것을 강요 당했는데, 그 게 달라진 것이다. 물론 내 형은 당시의 모든 부모들이 그러했듯이 엄격한 가정 교육에 따라 부모님과 이웃이 바라는 철저한 모범생으로 컸지만, 난 대개의 경우 반항아적 기질을 가지고 상궤(常軌)에서 벗어난 행동을 많이 했었다. 공부건, 운동이건, 인간성이건 모든 면에서 뛰어나고 남들의 감탄을 자아냈던 형과 달리 극히 평범하고, 어떤 면에서는 평범 이하였던 나를 부모님이 그처럼 사랑해 주시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지는 적도 많았다.

아이들이 바라는 모든 것을 해주면 그 아이들은 더 이상의 바램과 원망(願望), 그리고 기대를 잃게 되어 자식 교육을 망치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원래부터 호기심이 많았던 난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을 하고 싶었고, 부모님은 그렇게 하도록 도와 주셨다. 물론 항상 합리적인 아버님의 판단에 따라 제동이 걸리는 수도 있었지만 합당한 이유가 있는 모든 시도는 허락되었다. 형 순문의 모든 것을 통제하여 착하고, 능력있는 모범생으로 만드셨던 그분들이 형의 죽음으로 자신들의 시도가 무망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신 후에 교육 정책을 크게 선회시킨 것이다. 난 그런 혜택을 톡톡히 보게 된 것이다. 형에게 감사할 일이었다.

우리 집은 천호동에 있었다. 당시의 그곳은 호수(戶數)가 천 개에 달하여 이름을 경기도 광주군 곡교리에서 서울시 성동구 천호동(현재는 강남구를 거쳐 강동구가 되었다.)으로 바꾼 지 몇 년 되지 않는 별로 크지 않은 동네였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지은 우리 집이 천호동 최초의 2층집 양옥이었다는 사실을 보면 그 동네가 얼마나 작았는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집들도 보잘 것이 없고, 모두가 못 살던 시절이어서 당시의 천호동은 걸인들이나 불량배가 많았다. 그곳은 아이들이 자라기에 좋은 교육 환경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난 가까운 곳에 강이 있고, 송파나 약수터 같은 숲이 있는 그 동네를 좋아했다. 공부하길 싫어했던 내게 그곳은 놀기에 적당한 모든 요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었다. 집앞 50여 메터 앞에 있는 극장은 내 전용 극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임검을 나온 경관이나 단속을 나온 학교 선생님들이 들이 닥쳐도, 그 극장의 상주 인구(?)인 나는 사전 통보를 받고 피할 수 있을 정도였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난 부지기수로 많은 영화를 보았다. 그것을 통해 얻은 지식들은 그 후 세상을 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헐리웃 키드 중 하나로 커가고 있었다.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