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시원찮은 사위감

오랫동안 연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난 KOSA의 집에서 판단할 때 별로 좋은 사위감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집안과 종교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우리 집은 별달리 종교란 걸 가지고 있지 않은 집이었다. 난 결혼에 앞서서 결혼은 좋아하는 두 사람이 만나 함께 사는 것이라는 단순 논리만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은 연인들의 결합에 앞서 집안의 결합이라는 얘길했지만 결코 그 논리를 수긍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종교에 따른 갈등이 개입될 때 그것은 해결하기 매우 힘든 문제가 되어 버리고 만다.

어머님께서는 홀로 불교를 믿으신다고 하셨지만, 내가 보기에 어머님이 믿으시는 것은 거의 불교를 빙자한 사교에 가까운 것으로서 한 보살을 '장군님'이라 부르는 일종의 개인 숭배였다. 어머니는 당시 건강이 안 좋으셔서 타인의 권유로 그 교를 믿기 시작하셨는데, 그것도 신앙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서, 열심히 믿으시니 여의치 않으셨던 어머님의 병환을 치료하는 효과를 내고 있었다. 철 없던 나는 기왕이면 이름난 절에 가셔서 불교다운 불교를 믿으시라는 말씀을 드린 적도 있다. 하지만 그런 말씀이 아무런 효과가 없고, 그래도 어머님의 건강을 지탱해 주는 유일한 것이 그 교였기에 철이 난 이후에는 어머님의 종교 생활에 대하여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종교다운 교가 아니라 생각되어 "그럼 그 '장군님'이란 보살이 돌아가시면 그 땐 누굴 믿으셔야 하나요?"라고 물으니, 어머니는그에 대한 답을 가지고 계시지 않으셨고, 그 보살이 돌아가신 후에 어머님의 절 출입은 끝이 났다. 그 보살이 살아 생전에 "나 아닌 다른 것을 믿으면 복을 받지 못한다."고 하여, 그 계율을 지켜야한다고 하셨다. 난 사교건 뭐건 어머님의 건강을 지탱해 주던 존재가 사라진 것에 대하여 참으로 아쉬워하고, 겁을 냈는데, 다행히 어머님의 건강은 그 후 더 나빠지시지는 않았다.(사진: 유채꽃이 만발한 80년 4월의 제주도. 당시 신혼여행의 메카였기에 우리도 제주도에 갔다.)

종교적인 갈등

우리 집안은 원래부터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단지 철저히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조상을 열심히 숭배하는 전통만을 유지해 오고 있을 뿐이었다.(다른 집안보다 상당히 이런 경향이 크다.) 하지만 난 그 게 좀 아쉬웠다. 이상스럽게도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이 컸다. 지금은 소음 공해라 하여 교회에서 종을 치는 소리조차 듣기가 힘들지만, 내가 중고생 시절에는 모든 교회들이 종소리를 녹음해서 새벽이면 그 걸 고출력의 확성기로 틂으로써 새벽 기도 시간을 알리곤 했다. 난 종소리가 좋았고, 새벽에 일어나 교회를 향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부러워했다. 왠지 그 사람들은 성실하고, 경건한 태도로 삶을 영위하는 존재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색색의 전등을 켜고, 대형의 트리를 세우고, 여러 가지 행사를 하는 것이 보기에 좋았다. 그 때마다 내가 그들과 같은 일원이 아닌 것에 대하여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는 주위의 친구들을 따라서 일년 정도 천호동의 성결교회란 곳에 나가 보았다. 신앙심에서라기보다는 그곳에서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곳도 사람사는 곳이어서 미움, 시기, 질투 등이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아닌 교인들이 그러하는 걸 보면서 더 실망을 하기도 했지만, 그로 인해 교회를 다니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는 내가 교회에 나가는 것을 알면서도 말리지 않았다. 잠시 나가보는 것이려니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지켜보신 것 같다. 아버님은 청년 시절에 고향인 황산에 세워진 가나안농군학교의 설립자 김용기 장로로부터 그곳에서 함께 일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으셨었고, 한동안 그곳 가나안교회에 나가셨던 일도 있다는 말씀을 하시기도 했다. 난 그런 것이 교회에 나가는 일에 대한 무언의 허락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사진: 성산 일출봉에서의 기념 촬영. 신혼 여행 시에 한복까지 가져가는 것이란 걸 그 때 알았다. 아마 요즘 신부들은 귀찮아서 이렇게 까진 안할 걸?)

하지만 내가 눈이 오면 집안의 눈치우기에 앞서서 빗자루를 들고 교회로 달려가는 등, 돌출된 행동을 하는 걸 보시면서 부모님의 생각이 달라지신 것 같다. 특히 집안의 제사 등 조상 모시기를 극진히 하시는 분들에게 "이것도 우상숭배라는 데 난 제사를 안 지내면 안 될까요?" 등의 발언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여 난 제지를 받기 시작했다. 장남의 이같은 발언에 부모님은 상당한 충격을 받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단 제동이 걸리고 나니 집안에서 누구도 믿음을 갖지 않는 가운데, 홀로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교회 나가는 일을 포기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간 교회에서 경험한 학생회 활동과 기도회며, 수양회 등의 많은 일들은 그 후 교회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난 결국 교회로부터 멀어졌지만, 우리의 두 아이들은 유아기에서부터 교회에 나가도록 하고 있다.)

KOSA의 집안은 열렬히 기독교를 신봉하는 집안이었다. KOSA의 아버님은 감리교회의 목사님으로서 KOSA의 어머님을 신학대학 재학 시절에 만나셨다고 한다. 20년 생으로서 이화여전 (현 이화여자대학교) 음악과의 두 번째 졸업생인 KOSA의 어머님이 성악을 그만 두시고 포교에 전념한 것도 그 젊은 신학대학생을 만나 목사로 키우는(?) 과정에서 사랑에 빠진 때문이라고 한다. 내가 KOSA를 만났을 때 그 녀의 가족들은 특별한(?) 기독교를 믿고 있었다.

KOSA의 부모님을 만나 말씀을 나누던 중 난 "당연히 교를 믿어야지. 난 교를 안 믿는 사람을 성애의 배필로 삼을 순 없어."라는 단호한 말씀을 듣게 되었다. 사랑에 눈먼 자가 뭘 가릴 게 있었겠는가? 난 앞뒤 가리지 않고 "믿을 수 있다."고 말씀드렸다. 먼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을 뒤로 한 채 이런 심정을 우리 부모님께 토로했더니 또 한 차례 난리가 났다. 두 분 다 상냥하고 인사성 밝은 KOSA를 좋아하셨던 분들이건만, "이런 문제는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니, 알아서 해라."라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다. (사진: 성산 일출봉에서... 우리처럼 역시 신혼 여행을 온 중학교 동창을 우연히 만났다. 그가 셔터를 눌러 주었다.)

난 일단 KOSA의 가족을 따라 부산 못 미쳐 기장에서 열린 어느 교회의 트레이닝 캠프에 참가키로 했다. 2박3일 간의 캠프였다. 집에는 다른 핑계를 대고 여행을 떠났다. 그곳에 가보니 캠프장이 바로 그 교단에서 세운 섬유회사 내에 있었고, 그곳은 말하자면 그 교회의 트레이팅 캠프였던 것이다. 거기서 그 교회에 대한 많은 것을 보고, 들었다.(난 그 지도목사의 강연에 열광하는(실로 '열광'하는) 신도들의 모습과 찬송가를 부를 때 모두가 박자에 맞춰서 박수를 치는 것이 이채로웠다. 하지만 거기서 받은 인상은 매우 부정적인 것이었다. 그곳에 대한 당시 사회에서의 부정적인 시각에 대하여 여러번 들은 바가 있었는데, 그런 선입견도 많이 작용했다.(편견이라고 생각되지만 당시의 내 부족한 판단력 때문에 그런 선입견에 지배되었다.) 진위를 알 수 없는 그 교회에 대한 많은 소문들이 준 부정적인 선입견이었다. 특히 일반 교회에서는 그곳이 정통 기독교가 아닌 비주류라는 얘기를 많이 했다. 요즘은 찬송가를 부를 때 박수를 치는 교회들이 혹간 있는 것 같은데, 내가 교회에 나갈 때의 경험으로는 이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경건하고, 엄숙해야 할 곳에서 박수를 치고, 연예인에게 열광하듯 목사를 대한다는 것이 워낙 낯설기도 했다.

KOSA의 부모님은 그 캠프 참가 후의 내 모습에 대하여 많은 기대를 하신 것 같았으나 난 결코 그 교를 믿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특히 캠프에서 본 어느 아이 때문에 그러했다. 그 아이는 네다섯 살 정도되는 사내 아이였는데, 아무 것도 모를 그 아이가 자동인형처럼 박수를 치며 찬송가를 부르는 모습이 내게 보였던 것이다. 난 미래의 내 아이가 그런 모습을 가지길 원치 않았다. 난 그같은 감정을 그대로 KOSA의 부모님께 전달했다. 그로써 당연히(?)그분들의 눈에서 더욱 벗어나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사진: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난 당연히 무겁기는 하지만 사진빨(?)이 좋은 일안 리플렉스 카메라 등 많은 장비를 가지고 갔다. 대체로(?) 신혼 여행이란 것은 일생에 한 번 있는 것이니 괜찮은 사진을 남겨보자는 생각에서...)

홀로 남은 KOSA

KOSA는 그런 날 이해하고 있었다. 날 만나지 말라는 압력을 집에서 많이 받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당시엔 사랑의 포로. 어찌할 것인가? 우린 대책도 없이 서로를 만났고, 그런 문제들은 짐짓 잊은 체 했을 뿐이다. 결국 결혼식 문제가 돌출했을 때 난 종교적인 문제와 관련한 KOSA의 부모님의 뜻에 정면으로 반하는 몇 가지의 발언을 했다. 아르헨티나 포교 이민을 앞둔 KOSA의 집에서는 KOSA를 데려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홀로 남겠다고 했다. 그런 딸의 배신에 분노하며, 그녀의 부모님과 오빠는 이민을 떠났다.

결혼식 날짜를 두어 달 후로 잡은 상태에서 KOSA는 친지의 집에 있겠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 집에서는 부모를 버리고(?) 홀로 남은 KOSA에 대한 사랑이 극진했다. "그앤 이제 우리 딸이나 마찬가지다. 남이야 뭐라든 그 애가 제집이 아닌 다른 곳에 있게 할 수는 없다. 이제 우리 집이 바로 제집이니 들어오라면 어떻겠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유교적인 전통에 깊이 물들어 격식과 남의 이목을 두려워하고 살아온 완고한 분들이 그런 제안을 하리라곤 꿈도 못꾼 일이었다. 이런 제안에 KOSA도 당황을 했지만, 우린 오랜 만남에도 불구하고, 매번의 헤어짐에 마음아파하는 연인들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 하늘 아래 의지할 사람이라곤 나밖에 없었다. 결국 우린 예기치 않게 결혼식도 치르기 전에 함께 살게 되었다.

KOSA의 부모님은 결국 결혼식에 오시지 않았다. 예상되던 일이었기에 우린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KOSA의 먼친척이 서울에 계시기는 했지만 신부 입장 시에는 이원설 박사님이 수고를 해주셨다. 이 박사님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당연히 우리 결혼식의 주례가 되셨어야 할 분이었다. 그분은 KOSA의 여고 동창생인 이영란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한 쪽 집안의 손님이 적을 것 같아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식장인 타워호텔 1층 홀의 공간이 부족하여 일부 하객들이 식장 밖으로 나가있을 정도로 많이 와주셨다. 다행이었다. (사진: 신혼 시절. 아직 둘만 있고, 아이들은 없던 시절이다. 저녁 때 식탁에 앉아 얘길 나누고 있다. 스탠드의 조명만으로 분위기를 살린 사진을 찍고자 했다.)

Honeymoon & 신혼 시절

80년 당시의 신혼여행지는 당연스레 제주도가 선정되곤 했고, 그 건 우리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린 멀어서 자주 오지 못할 곳이니 차를 빌려 속속들이 구경을 해보자고 했고, 들릴 수 있는 모든 곳을 돌아 보았다. 4월이라 이른 줄 알았는데, 제주는 유채꽃이 만발해 있었다. 샛노란 유채꽃의 행렬은 그렇잖아도 들뜬 우리의 마음을 더욱 기쁘고, 풍요롭게 했다.

신혼 여행에서 돌아와 제기동의 공성 아파트에 신혼 살림을 차렸다. 난 장남이었지만 천호동에서는 직장인 경희대학교에 출퇴근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결혼과 함께 잠시 나와 살기로 하고 이사를 했던 것이다.(그 게 이날 이때까지 지속되고 있다.) 24평짜리 아파트를 전세내어 제기동에서 몇 년이나 살았다.(그곳은 내가 집 없는 설움에 울게 하기도 한 고마운 곳이다.)

이 세상을 살면서 사랑하는 여자와 둘이서만 오손도손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운 일인가를 그곳에 있을 때 알았다. 이 당시는 내가 컴퓨터에 푹 빠져있을 때이기도 했다. 이미 32비트 레지스터(16비트 CPU)의 개인용 컴퓨터인 매킨토시의 엄마(?) 리자(Lisa)란 컴퓨터가 세상에 출현하고, 모든 호환 기종 컴퓨터의 원조인 IBM PC 5150이 태어났는데도, 우리 나라에선 여전히 사무용의 8비트 컴퓨터가 판을 치고 있었고, 청계천의 일각에서는 애플 ][가 조립되기 시작했었다.(애플 사는 Apple II라고 표현 않고, Apple ][라 표현했었다. 기억하는 분들도 많으시리라.) 그 때 내가 가장 사랑한 여자는 KOSA였고, 두 번째로 사랑한 두 명의 여자는 초록색 눈(그린 모니터)의 PC였다. 그 때문에 KOSA는 그 당시에 출현한 신조어 '컴퓨터 과부'(computer widow)의 신세가 되는 적도 많았지만, 나의 그같은 바람기(?)를 잘 이해하고 있는 KOSA는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불평인 냥 그녀가 당시에 나가던 영어 회화 학원 SDA에서 행한 자유 스피치의 제목은 "Computer Widow"였었다. 하지만 내용은 '앞서 가는 남편'에 대한 자랑이었다.

우린 자주 극장에도 갔고, 아파트 옆에 새로 생겨 당시엔 차도 없던 길에서 롤러 스케이트나 스케이트 보드를 즐기기도 했다. 저녁 때는 우리가 "세느강"이라 부르던 (지금은 복개된) 제기천변을 걷기도 했는데, 그곳은 아파트에서 내려다 볼 때와는 달리 지저분하고, 물이 썩는 냄새가 나서 그같은 데이트는 오래 가지 않았다. 당시는 '가고파'란 재미난 이름이었던 부근의 백화점이 미도파 백화점에 합병되어 제기동 미도파로 새로이 단장을 한 때였다. 우린 자주 그 백화점에 나가서 쇼핑을 하곤 했는데, 가까운 곳에 백화점이 있어서 여러 모로 편하고, 그곳은 함께 걸으며 얘기를 나누고 찬거리를 사는 좋은 공간이기도 했다.

허니문 베이비였던 큰 아이가 그곳에 있을 때 태어나고, 거기서 유아기를 보냈다. 그곳에서 150여 메터 정도 떨어진 곳에 '등대 교회'란 개척 교회가 있어서 아이는 그곳 유아원에 다니며, 교회의 분위기를 익히고, 제 엄마와 함께 그곳에 갔다. 나도 교회를 나가는 일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밖에 나와 살면서 교회에 나가는 것은 교회에 나가는 것을 반대하셨던 부모님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나가지 않았다.

공성 아파트와 담을 마주한 것이 직물검사소였는데, 그곳엔 좋은 클레이 코트가 있었다. KOSA와 난 그곳에서 자주 테니스를 하곤했다. 임신을 한 상황에서 테니스와 같이 격렬한 운동을 하면 안 된다는 얘길 듣고서야 예비 부모인 우리들은 놀라서 라켓을 거두었다. 둘 째 아이가 태어나고, 집을 사서 현재의 경희대 옆 이문동으로 이사한 후에는 경희대 테니스 코트에서 자주 테니스를 했다.(사진: 공성 아파트 시절 테니스 장에서의 KOSA)

또 한 시대의 개막

KOSA가 테니스 엘보우(tennis elbow)에 걸리는 바람에 나까지도 테니스에 대한 열의가 식어 버린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테니스는 참으로 매력적인 운동이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테니스를 못 하게 되면서 KOSA는 기다리던 스키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공부에 미쳐 그 좋아하던 스키마저 멀리하던 나는 다시금 스키에 몰입하게 되었다. 스키에 대한 열정은 활화산처럼 불타 올라서 난 겨울이면 스키 타령만 하고 살았고, KOSA 역시 이 멋진 스포츠에 나보다 훨씬 깊이 빠져 들었다. 그것은 자신이 기대하던 것 이상의 운동이었다고 했다.(사진: 오랜 만의 스킹. 사진을 찍느라 가슴을 열었지만, 난 언제나 유럽식의 정통적인 스킹 방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스킹을 했다.)

두 아이의 부모가 되면서 우린 드디어 '우리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는 우리가 '그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우리의 시대는 피안으로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