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풍경의 유명산(有明山, 862m)
한겨울 풍경의 유명산(有明山, 86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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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0, 수] 비가 온 다음날의 등산은 쉽지 않다. 그것도 가을 낙엽이 많이 떨어진 등산로에 비가 내리면 길이 아주 미끄러워지기도 한다. 근데 화요일에 비가 오고, 다음날 추워진다는 예보가 있었다. 그러니 가평 설악면의 800m 고지의 산은 더 추울 것이다.
아침 일찍 기상을 체크하니 설악면의 기온은 영하로 내려갔다. 출발하며 다시 체크하니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갔지만 겨우 섭씨 2도 정도. 산에 올라가면 많이 추워질 것이다. 혹 전날 비가 왔을 때 산간에서는 눈이 내렸을 수도 있다. 그래서 옷을 잘 챙겨입었다. 기능성 이너 웨어를 챙겨 입고, 바지는 밀레(Millet)의 기모 겨울 바지로 택했다. 상의는 K2의 방풍의를 한 겹 더 입을 참이다. 그리고 기모가 있는 빨간색의 자전거용 펄이즈미 윈드스토퍼 재킷은 배낭 위에 묶어놨다.(배낭 속엔 항상 넣어놓은 후드 달린 아노락/anorak이 하나 더 들어있기도 하다.)
유명산은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과 양평군 옥천면의 경계에 위치한 산. 산림청과 블랙야크의 100대 명산에 속한 산이다. 그곳의 산책로(둘레길) 역시 한국의 100대 산책로 중의 하나라고 한다. 자연휴양림이 잘 만들어졌다고 소문난 산인데, 특히 유명산 계곡의 수많은 소(沼)와 작은 폭포들은 여름에 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천국 같은 경치를 보여준단다.
원래 유명산은 조선시대에 "말을 방목했다."는 뜻으로 마유산(馬遊山)이라 불렀다.(대동여지도에 이렇게 나와있다.) 하지만 산림청의 지형도 상에는 1973년까지 무명산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 해 엠포르산악회가 이 산을 오르며 이름을 지어주었다. 등산회의 일원인 '진유명'(여)의 이름을 따 유명산(有明山)으로 명명하여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한 편 어이없는 일이긴 하지만,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산의 이름으로 남겼으니 그건 참 대단한 행운이라 할 것이다. 앞서 잠깐 얘기한 것처럼 유명산은 기암절벽과 작은 폭포가 많아서 절경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가평 8경 중 맨 끝에 해당하는 유명농계(有名弄溪)로 등재된 것이다. 1989년에 개설된 유명산 자연휴양림은 지금까지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산의 대표적인 등산로는 두 개다. 유명산자연휴양림의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산기슭의 사방(沙防)댐 부근에서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대체로 오른편은 등산로, 왼편의 계곡로는 하산로로 불린다. 난 처음 올라가는 산이라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가기로 했다. 오른편으로 올라 왼편으로 내려오는 전형적인 코스를 택하기로...
산행 코스: 가평 유명산자연휴양림 주차장 - 갈림길 능선 - 정상 - 합수점 - 갈림길 - 자연휴양림 주차장 복귀
코스의 길이는 약 7km이고, 약 3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나는 각 7.64km, 3:08 시간이 걸렸다.
유명산이 있는 설악면 가일리로 가며 보니까 높은 산들의 북면은 하얗다. 역시 다른 곳에 비가 올 때 산간엔 눈이 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휴양림 주차장에 내리니 꽤 쌀쌀한 느낌이었다. 거기서는 눈쌓인 산이 보이지 않았다. 주차장 화장실 오른편으로 사방댐이 있는 곳까지 아스팔트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그곳의 갈림길에서 오른편으로 가니 금방 왼편에 등산로 들머리가 나타난다.
산을 오르며 보니까 전날 내린 눈이 남아있어서 미끄러웠다. 등산로를 400m 정도 걸어올라가니 거기서부터는 겨울 산행을 하는 느낌이었다. 주변에 눈쌓인 곳도 많고... 대략 아침 10시경에 올라갔는데 나보다 먼저 올라간 사람의 발자국이 보인다. 근데 폴 자국이 없는 것으로 보아 폴도 없이 그 미끄러운 길을 올라간 것 같다. 가끔 미끄러진 자국이 보였다.(정상 가까이서 먼저 올라갔다 내려오는 분을 만났는데 역시 폴이 없이 올라갔고, 그래서 고생하셨다고...)
정상에 이르기도 전에 손이 시리고 귀가 시릴 정도였다. 더 춥다고 느껴지면 배낭 안의 장갑과 버프를 꺼내려고 했는데 결국은 끝까지 그 두 가지가 없이 등산을 마쳤다. 정상에 올라가니 거긴 설국이다. 정상석 부근에 다른 등산객 한 분이 있었다. 그리고 그분이 만든 것인지 정상석 옆에 예쁘게 만든 눈오리가 놓여있었다. 올라가는 길은 2km, 계곡 경유 하산길은 4.1km이다. 대개 정상에 오르면 그 주위에서 점심을 먹곤했는데 이날은 춥다보니 뭘 먹고 싶은 생각도 안 났다. 추워서 빨리 내려가야겠다는 생각뿐.
내려오는 길도 한동안은 눈길이었다. 비에 젖은 낙엽이 깔린 길에 눈도 살짝 덮여있으니 여차하면 넘어질 참이다. 다행히 폴이 있어서 넘어지지 않고 잘 내려올 수 있었다. 내려오는 중에 대학친구들이 용평리조트의 발왕산 등산을 하면서 사진을 찍어보내 왔다. 올들어 처음 보는 상고대라는 설명을 붙였는데... 내가 보니 상고대가 아니었다.^^; 이날 유명산도 정상 부위의 나무나 풀들은 온통 눈을 뒤집어쓰고 있어서 멋졌는데 그 역시 상고대는 아니었다. 그냥 나무에 눈이 내린 게 안 녹고 붙어있는 것이었다. 상고대는 서리가 나무나 풀에 눈처럼 얼어붙어 있는 걸 말하기에 발왕산이나 유명산이나 상고대 아닌 눈이 쌓인 것 뿐이다.
해발로 쳐서 150~200m 정도 내려오니 정상 부근의 그 많던 눈은 다 사라지고 거기서부터는 비가 온 가을산의 모습이다. 그리고 곧 계곡에 이르니 물소리가 요란하다. 유명산 계곡은 워낙 물이 많아 작은 소들이 여기저기 보이고, 그 소에 이르기 직전에 작은 폭포들이 더 요란한 물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정말 보기 좋은 풍경이었다. 대략 3km 정도를 내려오는 동안 등산로 옆에 계속 계곡이 보여서 좋았다.
계곡로를 내려오면서 생각해 보니 내가 등산로 선택을 잘못 했다. 경사가 급하나 짧은 길로 빨리 올라가 천천히 내려오자는 생각을 한 것인데, 그보다는 계곡로를 천천히 올라 빨리 내려오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본 것이다. 이유는 계곡물을 내려가면서 뒷모습으로 보는 것보다는 올라가면서 봐야 소나 폭포들을 정면에서 보다 3차원적인 제 모습으로 멋지게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번에 유명산에 갈 때는 사방댐 부근의 갈림길에서 왼편 계곡 하산로를 거꾸로 올라갈 참이다.
아직 가을인 줄 알았는데 서울 북방의 800고지에 오르니 거긴 이미 겨울이다. 이젠 등산을 하려면 아이젠도 챙겨가야할 것 같다. 언제 그걸 쓰게 될 지 모르니까... 유명산 등산에서도 정상 부근에 오르니 바람이 세차고 추워져서 등산로의 눈들이 그러다 곧 얼어버릴까 겁날 정도였다. 그래서 '이거 아이젠을 가지고 왔어야 했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아직 본격적인 겨울이 아니나 높은 산엔 겨울이 왔다. 하긴 전방부대에선 10월 초부터 춥지 않던가? 그 때 정도면 보초를 설 때 정말 추워서 온갖 의류를 다 챙겨입고 나가야한다. 등산을 할 때 지나친 준비란 건 없다. 당장 쓰지 않을 것이라도 미리 챙겨놓는 것이 안전의 지름길이고 그게 살 길이니...
근데 겨울엔 스키 타기 바쁜데 등산을 하게 될까? 올해 내 스키 베이스였던 남양주의 스타힐리조트가 폐업을 함께 따라 웰리힐리파크로 스키를 타러 가게 되었다. 전처럼 스키장이 가까워 맘먹으면 아무 때나 가는 일은 없을 듯하다.(전엔 그래서 일주일에 이틀 이상 스키를 타곤 했었는데...) 강원도 스키장으로 가다 보면 스키는 주말에 단 하루를 타고, 주중에 서울 근교의 산을 한 번 등산하는 일이 생길 지도 모르겠다.